
'혁신'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미국 기업들이 생각난다. 테슬라, 앤비디아, 오픈AI, 애플, 구글 등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 기업과 실리콘밸리를 통해 혁신의 모습을 그려왔다.
하지만 '중국 AI 미래지도'를 읽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혁신을 특정 기업의 성과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 생태계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평소 지역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온 여러 방안이 중국에서는 이미 구체적으로 시도되고 있었다. 그 방향에 공감하는 한편, 지역의 산업과 대학, 연구기관, 인재와 자본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혁신 생태계가 기업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도전과 실패를 허용하고, 다양한 인재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강점으로 한다면, 중국의 혁신 생태계는 국가가 장기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지역과 산업 단위에서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특징이 있다. 국가가 제시한 전략적 틀 안에서 지역과 기업이 혁신을 시도하고, 필요한 기술과 인재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생태계를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는 어느 한쪽이 더 옳거나 우수하다는 문제라기보다 각 국가가 지닌 정치·경제적 체계와 성장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혁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중국 일부 지방정부가 자본·데이터·시장을 연결하며 지역의 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이었다. 그중 지역 생태계의 관점에서 눈여겨본 내용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1. 허페이 모델: 지역 이기주의를 넘어선 전략적 자본의 탄생
허페이 모델은 지방정부가 벤처캐피털의 역할을 수행하며 유망 기술기업에 직접 투자하고 산업을 키우는 중국식 산업 모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책에 따르면 허페이시는 과거 디스플레이 기업 BOE에 투자해 얻은 수익을 AI 반도체 기업인 창신메모리와 양자컴퓨팅 기업인 본원양자 등에 다시 투자했다.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재정을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그 성과를 다시 새로운 산업에 환류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지방정부가 단순한 예산 집행기관을 넘어 지역의 미래 산업을 발굴하고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산업 투자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2. 본사 유치보다 실질적인 지역 연계를 선택한 투자
선전과 청두의 지방정부 펀드는 유망한 AI 기업에 무리하게 본사 이전을 요구하기보다, 해당 지역의 기업과 실질적인 기술 제휴를 맺거나 지역이 보유한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성과를 만들어낼 것을 요구한다.
기업의 주소지를 지역으로 옯기는 것보다 지역의 산업·데이터·시장과 실제로 연결되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 지방정부 펀드의 AI 프로젝트가 의미 있는 투자 성과를 거둔 사례로 소개한다.
지역기업 유치의 성과를 본사 이전이나 기업 수 증가로만 판단하지 않고, 지역 산업과의 협력 및 시장 창출 여부를 중심으로 바라본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3. 단기 성과를 넘어선 인내자본
지푸AI와 문샷AI 같은 LLM 유니콘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단기간의 수익보다 기술의 가능성과 장기적인 성장을 기다려주는 인내자본이 있었다.
AI와 딥테크 분야는 기술개발과 시장 진입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적인 매출이나 성과만으로 기업을 평가하면 지역에서 새로운 기술기업이 성장하기 어렵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능성 있는 기업을 발굴하고 기술개발과 시장 진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자본이 필요한 이유다.
자금을 넘어 데이터와 시장을 연결하는 지방정부
책에서 소개하는 중국의 지방정부 펀드는 단순히 자금을 공급하는 투자자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민간의 투자 방식을 활용하는 동시에 공공조달을 통해 초기 매출이 부족한 AI 기업에 판로를 열어주는 시장 조성자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선전시는 투자한 자율주행 기업에 시내버스 노선의 시범운행 기회를 제공하고, 청두시는 의료 AI 스타트업이 지역 보건 현장에서 기술을 적용할 수 있도록 초기 시장을 연결한다.
일부 중국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정책을 집행하는 수동적인 행정조직을 넘어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고 데이터를 활용하며 시장을 만들어내는 지역 혁신의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 지역 생태계에 주는 시사점
중국의 사례를 우리 지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정치·경제적 체계와 지방정부의 권한, 금융과 투자 관련 제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이 단순한 사업 집행자가 아니라 자본과 데이터, 시장을 연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10여 년동안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의 핵심 주체로 인식하고 다양한 지원정책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스타트업 생태계가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 생태계만 따로 살펴보면 여전히 중앙정부의 공모사업과 보조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많은 예산이 지역에 투입됐지만, 지역이 스스로 산업을 발굴하고 자본을 운용하며 시장을 만드는 역량으로 충분히 이어졌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지자체가 보다 분명한 주도권을 갖고 지역의 자본과 데이터를 설계하며,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초기 시장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중국 지방정부의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자본-데이터-시장'의 연결이다.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초기 고객이 되어 기업에 실증과 판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지역이 보유한 공공데이터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산업 자산으로 정비하고, 지자체가 출자한 지역 편드와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장기적인 투자가 이뤄지는 방식도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규제샌드박스와 다양한 실증사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실증이 실제 시장 진입과 후속 성장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실증 자체를 성과로 보는 데서 벗어나 초기 도입과 공공조달, 민간시장 진입까지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지역별로 축적된 산업을 기반으로 어떤 인재를 육성하고, 그 인재가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도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지역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우리 지역만의 산업적 자산과 매력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정책 환경이 달리지더라도 지역이 선택한 장기적인 방향을 일관되게 이어가는 힘도 필요하다. 단기간의 사업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고, 데이터를 활요하며, 시장을 만들어내는 역량이 축적해야 한다.
결국 지역 생태계의 활성화는 더 많은 지원사업을 만든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역이 자신이 가진 산업과 자원을 이해하고, 이를 자본·데이터·시장과 연결하며 스스로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